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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개발”이라는 모욕: 우리에겐 다른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승훈
2023-10-03
조회수 568

얼마 전 연합뉴스의 두 기자는 대통령 뉴욕 순방 관련 기사에서 대통령이 순방 동안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해 "전력투구"했으며, "이름도 처음 듣는 저개발국 정상들에 허리를 숙였다"라고 썼다.* 국가기간뉴스통신사에서 발행한 이 짧은 문장에는 한국은 "발전"했다고 으스대는 오만함과 "저개발" 국가에 대한 멸시,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익"을 위해 그런 "무명의 나라"에까지 "허리를 숙였"던 대통령에 대한 찬양까지 수많은 문제가 담겨있다. 그리고 몇몇 언론은 이 기사를 그대로 받아썼다. 참고로 유엔 총회를 계기로 대통령이 만난 정상은 네팔 총리, 북마케도니아 대통령, 시에라리온 대통령, 기니비사우 대통령, 몽골 대통령, 에스와티니 국왕, 그리스 총리, 스위스 대통령, 레소토 총리, 부룬디 대통령 등이다. 연합뉴스 기자는 이 중 누구를 "이름도 처음 듣는 저개발국 정상"이라고 생각한걸까?

* 해당 기사는 "역대 가장 쉴틈없던 尹 순방…귀국길 직전까지 '부산 이즈 레디'"라는 제목으로 9월 22일 업로드되었고, 이후 몇몇 누리꾼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10월 3일 오늘까지도 이 문장은 수정되지 않았다.


연합뉴스 기사 화면 캡쳐

인류학자들은 "마주침(Encounter)"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고들 한다. 비판적 발전 연구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Encountering Development: The Making and Unmaking of the Third World”를 쓴 인류학자 아르투로 에스코바(Arturo Escobar)는 네팔의 개발 프로젝트 현장에서 “발전 개념의 네팔화(Nepalization of development concepts)”를 포착한 레이 피그(Leigh Pigg)를 인용하여 “발전을 마주하는 것을 두 문화의 충돌로 보기보다는 교차를 통해 사람들이 서로를 특정한 방식으로 보게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차이는 새로운 방식으로 재현되고, 지배적인 형태(카스트, 계급, 젠더 등)가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며, 새로운 사회적 배치가 드러난다”(49쪽)고 썼다. 예를 들어 국제 원조기구의 “개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지구촌 남반구(Global South) 현장에서는 소위 말하는 선진국의 “전문성”과 “지원”이 일방적으로 전해지는 것 같지만 그 마주침의 현장에서는 수많은 긴장과 뒤섞임도 함께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주침을 경험한 국제 원조기구, 그 직원, 그리고 프로그램의 "대상"이 되는 지역과 그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 전과 같지 않은 존재가 된다.

Escobar, A. (2012). Encountering development: The making and unmaking of the third world (2012th ed.). Princeton University Press.

많은 정상회담과 해외 순방을 취재했을 두 기자는 왜 지구촌에 존재하는 여러 나라를 "이름도 처음 듣는" "저개발국"이라 불렀을까? 그리고 후보 시절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대통령의 세계관은 취임 이후 "기네스북 급"으로 많은 정상을 만나 이야기 나누면서 조금이라도 나아졌을까? 마주침으로 인한 변화의 방향이 늘 더 나은 곳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통해 혹은 방문 경험을 통해 아프리카를 경험하는 사람들을 봐도, 누군가는 아프리카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더 강해지거나 이러한 “저개발국”에 해답을 줄 수 있다고 믿는 “전문가”로서 정체성을 더 단단히 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아프리카 경험을 통해 아프리카뿐 아니라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고민한다.

이번 기사에서 두 기자가 아무렇지 않게 모욕적인 표현을 쓴 것처럼, 세계화되었다는 시대의 수많은 "마주침"에도 불구하고 각국을 경제 규모에 따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저개발국/후진국"으로 나누어 보는 시각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세계관 속에서 다양성과 개성은 사라지고, 그들을 뭉뚱그려 "저개발"로 내려다보는 모욕은 일상화된다. 그리고 “저개발”을 포함해 남반구 국가들이 겪는 다양한 어려움을 마치 “이름도 처음 듣는” 남 일처럼 대하는 사태를 맞는다.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를 쓴 환경인문학자 롭 닉슨(Rob Nixon)은 자극적인 이미지가 넘쳐나고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바뀌는 오늘날, “눈에 보이지 않게 일어나는 폭력, 시공을 넘어 널리 확산하는 시간 지체적 파괴, 일반적으로 전혀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는 오랜 시간에 걸쳐 벌어지는 폭력”(18쪽)을 드러내기 위해 “느린 폭력(slow violence)”이라는 표현을 썼다. “느린 폭력”의 시선으로 보면 이번 정부가 추진하는 원전 확대, 무기 판매, 일본 원전 오염수 방류 방관도, 대량으로 생산하고 대량으로 소비하는 우리네 삶의 양식도, "개발"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대규모 건설과 삼림 파괴도 모두 폭력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시나브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저개발” 국가에 스며든다. 이런데도 우리는 계속 이들을 "저개발"이라 뭉게버려도 되는 걸까?

얼마 전 있었던 9.23 기후정의행진에서는 노동자, 농민, 홈리스,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지구촌 남반구가 기후위기의 최전선을 살아가는 존재로,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알려줄 수 있는 중요한 존재로 호명되었다. 만약 그들을 가난하고 "저개발"된 존재로만 생각했다면 무시하거나 불쌍하게 여기고 말았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다르게 볼 수 있다.

 9.23 기후정의행진에서 '다잉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참여자들. 사진: 우승훈

습관처럼 되어버린 모욕을 멈추고 우리 자신과 세계를 다르게 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미국을 정점에 두고 경제 지표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줄 세우는 낡고 닳은 생각에서 벗어나 나와 세상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상상하는 능력, 다양한 삶과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한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이 엄마에게 이상한 노인 취급을 받은 박완서 작가는 그 일화를 소개하며 이런 말을 했다.

"상상력은 남에 대한 배려, 존중, 친절, 겸손 등 우리가 남에게 바라는 심성의 원천이다. 그리하여 좋은 상상력은 길바닥의 걸인도 함부로 능멸할 수 없게 한다." - 박완서, 운수 안 좋은 날(2004)

그 아이 엄마가 자신의 아이가 이야기를 나누는 저 노인에게도 손녀에 관한 추억이 있을 수 있고, 아이와 나눌 이야기가 있고, 결국은 삶이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면 "보자보자 하니 나잇살이나 먹어가지고"라며 아이를 낚아채가진 않았을 것이다. 이번 대통령 순방 기사를 쓴 연합뉴스 기자들도, 예전에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대통령도 다른 세계와 삶을 떠올릴 상상력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다른 나라와 사람들을 모욕하고 비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상대방을 모욕하면서 함께 갈 수 없고, 낡은 개발의 상상에 갇혀서는 다른 미래를 맞이할 수 없다. 우리에겐 다른 상상력이 필요하다.



* 이 칼럼은 브런치에 썼던 "모욕과 상상력"을 깁고 다듬어 쓴 글입니다. (https://brunch.co.kr/@theafricanist/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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