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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어치의 “관련성”도 없다고요?: 정부의 국제질병퇴치기금 납부금 폐지 시도, 글로벌 연대로 답하자

승훈
2024-04-20
조회수 916

2024년 3월 27일 열린 제23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 경제가 회복세에 있다고 자평한 뒤, 이러한 회복세가 민생 경기 전반으로 빠르게 퍼져나가도록 각종 부담금을 정비하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존재하는 91개의 부담금 중 18개는 폐지하고, 14개는 감면하겠다고 하는데, 폐지 대상으로 지목된 부담금 중 하나가 해외 출국 시 납부하는 출국납부금 11,000원에 포함된 질병퇴치기금 납부금 1,000원이다. 나머지 10,000원은 관광진흥개발기금 납부금인데, 정부는 이 또한 7,000원으로 인하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대통령의 말에 맞춰 세부 내용을 발표한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질병퇴치기금 납부금의 폐지 이유는 “해외여행 출국자와 개도국 질병 예방간 관련성 미흡”이다.


출처: 부담금 정비 및 관리체계 강화 방안(기획재정부)


항공권에 글로벌 문제 대응을 위한 기여금을 포함하자는 생각이 구체화 된 것은 2005년 뉴욕에서 열린 유엔 정상회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회의에서 각국 정상은 빈곤과 기아에 대응할 재원 조달을 위한 혁신적인 자금 조달 방안이 필요함을 확인하고, 다음 해 브라질, 칠레, 프랑스, 스페인이 주도하여 혁신적 발전 재원 조달을 위한 선도그룹(Leading Group on Innovative Financing for Development)을 출범했다.


이때 논의된 혁신적인 자금 조달 방안 중 항공권에 국제 빈곤이나 질병 퇴치를 위한 기여금을 포함하는 제도를 항공권연대기금(Air Ticket Solidarity Levy)이라 부르는데, 논의를 막 시작한 2000년대 중반에는 여러 나라가 이를 도입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프랑스와 한국 정도만 이 제도를 제대로 시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에서는 연대세(Solidarity Tax)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인 기금은 프랑스 정부의 글로벌 공중보건 프로젝트 재원과 프랑스 국내 대중교통 발전 기금에 활용되고 있다. 납부금은 목적지와 비행기 좌석 등급에 따라 최소 2.63유로(한화 약 3,800원)에서 최대 63.07유로(한화 약 91,000원)로 한국보다 훨씬 비싸다.


 출처: 프랑스 Ministère de la Transition écologique et de la Cohésion des territoires 홈페이지


2007년 한국은 브라질과 노르웨이에 이어 혁신적 발전 재원 조달을 위한 선도그룹의 세 번째 의장국이 되는데, 이때 혁신적 발전재원 조달의 한 방법으로 한국에서 출발하는 모든 국제선 항공권 탑승객에 천 원씩 부과하는 ‘국제빈곤퇴치기여금’ 제도를 한시적으로 도입했다. 처음엔 5년 기한으로 시작했다가 2012년 국회가 다시 5년 연장 법안을 통과시키며 기한이 연장되었다. 당시 제도 연장을 요구하며 GAVI와 굿네이버스, 기아대책, 등대복지회, 비전케어, 세이브더칠드런, 아프리카미래재단, 어린이재단, 월드비전, 플랜코리아, 하트하트재단, 한국국제봉사기구와 같은 국제개발협력 단체가 대국민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차례 연장된 이후 2016년에는 <국제질병퇴치기금법>이 제정되며 2017년 지금의 ‘국제질병퇴치기금’으로 상설화되었다.


출처: 국제질병퇴치기금 인스타그램 (@gdef_official)


2007년부터 2023년까지 국제질병퇴치기금에는 누적 약 4,250억 원이 들어왔고,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한 해외여행 제한이 본격적으로 풀린 2022년에는 역대 최대인 558억 원, 2023년에는 398억 원이 적립되었다. 이렇게 조성된 기금은 크게 민관협력사업, 국제기구협력사업, 글로벌사업을 통해 집행되고, 소외열대질환, 수인성질환, 주요 3대 감염병(결핵, 말라리아, HIV/AIDS)에 대응하는 활동을 주목적으로 한다. 2020년 국제질병퇴치기금의 성과를 다룬 2020년의 한 기사는 기금을 통한 그간의 성과를 “△민관협력사업 수혜자 276만4691명 △국제기구협력사업 수혜자 1천513만2682명 △산후관리를 받은 산모 10만2803명 △예방접종을 받은 아동 6천2백만 명 등이다. 국제질병퇴치기금 운영 이후 개발도상국의 질병 예방 및 퇴치는 물론 국민들의 인식 역시 날로 긍정적으로 개선되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기사에는 산출근거가 정확히 나와 있지 않아서 숫자를 조심해서 볼 필요는 있지만, 어쨌든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보건 관련 활동을 했다는 것은 알 수 있는 숫자라고 생각한다.


출처: 국제질병퇴치기금 리플릿 (KOICA, 2020년)


국제질병퇴치기금은 한때 현 정부 외교의 중심에 놓이기도 했다. 한국사람들에게는 “날리면” 논란의 현장이 되어버린 2022년 글로벌펀드(Global Fund) 제7차 재정공약 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앞으로 3년간 1억 달러를 기여하겠다고 발표한 적이 있는데 한국 정부의 글로벌펀드 기여의 주된 재원이 바로 이 국제질병퇴치기금이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순 계산으로 따지자면 연평균 3,333만 달러를 3년간 집행해야 하는데, 이는 질병퇴치기금 연 수입에 맞먹는 금액이라 다른 정부 자금을 끌어다 쓰지 않으면 지킬 수가 없다. 올해 예산에 따르면 외교부는 질병퇴치기금 운용을 위해 한해 기여금 수입을 웃도는 520억 원을 공공자금관리기금으로부터 융자할 예정인데, 아마 글로벌펀드 기여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국제질병퇴치기금이 이렇게 일종의 적자 운영을 하는 상황임에도 기재부가 발표한 문서에는 해외 출국자에게 받는 국제질병퇴치기금 기여금을 폐지한 이후 기금 운용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없다. 이참에 기금으로 하던 사업을 일반회계 예산에 편입해서 세금을 더 투입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수 있겠지만 이미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는 정부가 그럴 여력이 될지 모르겠고, 무엇보다도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폐지 이유가 영 마음에 걸린다.


“해외여행 출국자와 개도국 질병 예방간 관련성 미흡”


이는 해외여행 출국자와 개도국 질병 사이에는 "천원어치"의 관련성도 없다는 말인데, 정말 해외여행 출국자와 글로벌 질병퇴치 활동은 천원만큼의 “관련성”도 없을까? 


정부가 “관련성 미흡” 이야기를 꺼낸 건 사실 처음이 아니다. 2011년 국제개발협력 NGO의 연대체인 한국해외원조단체협의회(현 국제개발협력민간위원회, KCOC)는 당시에도 정부 일각에서 제기된 “납세 의무자와 사용용도 사이의 관련성이 미약”이라는 의견에 “납세의무자와 사용용도간의 관계에 대해 관련성은 자의적인 판단이며 아프리카 질병퇴치를 위하여 납세의무자가 별도로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음”이라고 답한 것을 포함한 의견서를 발표한 바 있다. 2020년 외교부 산하 기관이자 국제질병퇴치기금의 집행을 담당하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서 발간한 국제질병퇴치기금 리플릿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Q. 국제질병퇴치기금, 왜 출국납부금으로 운영되나요?

A. 감염병은 비행기 이동경로를 따라 전파되기 쉬워요! 그래서 국내 공항을 통해 출국하는 국제선 항공료에서 출국납부금 형태로 기금을 조성하고 있죠.


Q. 개발도상국가 질병을 퇴치하기 위한 비용을 왜 우리나라 국민들이 지불해야 하나요?

A. 2018년 해외유입에 의한 법정 감염병 신고건수는 597건으로 2017년(531건) 대비 12% 증가하였고, 매년 증가 추세입니다. 국제이동으로 유발되거나 전파가 확산되는 감염병 예방, 퇴치를 지원함으로써 우리국민의 건강도 보호하고 국제사회의 지속가능개발에 기여하기 위함입니다.


KOICA가 발간한 리플릿에서 잘 설명하는 것처럼, 한국 시민이 해외에서 감염병에 걸릴 수 있다는 직접적인 “관련성”도 있고(해외에서 말라리아 등 모기 매개 감염병에 걸려 사망하는 일도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이런 통계까지 가지 않더라도 얼마전까지 지구촌 모두가 코로나19 범유행을 경험하며 체감한 “관련성”도 있다. 어쩌면 2011년 한국해외원조단체협의회의 의견처럼 누구에게 돈을 낼 의무가 있는지 따지는 것 자체가 본질을 벗어난 것일 수 있다. 


그간 전 세계적으로, 혹은 특정 국가나 지역에서 유행했던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ARS),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에볼라 바이러스병 등은 우리가 감염병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위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연대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특히 2020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코로나19 범유행은 2023년 12월까지 누적 감염 7억 7천 건, 사망자 698만 명을 기록했으며, 한동안 우리 모두의 삶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친 감염병이다. 수많은 감염병 사태에서 내 이익, “우리” 회사, “우리” 나라만 챙기는 이기주의는 바이러스가 가장 취약한 곳을 파고들어 숨을 고르거나 모습을 바꿔 다시 돌아오는 결과로 이어졌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도시화와 슬럼화, 늘어나는 국제 이동과 폐기물 처리의 어려움은 이런 대규모 감염병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을 더 높이고, 기후변화와 산림 파괴와 같은 생태계 변화는 말라리아나 지카 바이러스 감염병 같은 모기 매개 감염병과 동물에서 사람으로 바이러스가 뛰어넘는 종간 감염의 가능성을 높인다. 코로나19 범유행은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맞이하게 될 새로운 시대의 서막, 그것도 앞으로 닥칠 일에 비하면 “순한 맛”인 서막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세상인데도 “해외여행 출국자와 개도국 질병 예방간 관련성 미흡”이란 주장을 하는 정부의 인식은 비현실적이다. 더 걱정되는 점은 이 정도의 “관련성” 인식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올해 공적개발원조(ODA)에 전년도보다 1조 5천억  원이나 많은 6조 원 이상의 세금을 투입할 예정이란 점이다. 시민 1인당 약 12만 원꼴로 이번에 폐지하겠다고 밝힌 국제질병퇴치기금 납부금 천원의 120배에 달하는 이 ODA 예산을 설명하는 “관련성”은 무엇일까?


정부는 이번 부담금 정비를 통해 국민의 체감 부담을 완화하고 기업의 경제활동을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금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번 정비의 혜택이 건설 등의 개발 업계에 압도적으로 많이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부가 발표한 안을 기준으로 1년에 2번 온 가족이 비행기를 해외를 방문하고, 마침 모두가 여권을 재발급받을 때가 되었고, 차량을 한대 보유하고 있고, 온 가족이 영화를 분기마다 보는 (심지어 요즘은 기준으로 삼아도 될까 싶은) 4인 가구가 있다면 이번 부담금 정비로 받는 혜택은 1년에 94,760원, 월 평균 7,896원이다. 반면 분양사업자는 분양가격의 0.8% 부과되던 학교용지부담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개발사업시행자들은 개발이익의 20% 또는 25% 부과되던 개발부담금을 2024년에는 수도권에서는 절반만, 비수도권에서는 전혀 내지 않아도 된다. 


출처: 부담금 정비 및 관리체계 강화 방안(기획재정부)


2023년 8월,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2024년 예산안을 설명하며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 있는 역할과 기여도 확대해야 합니다. 우리 경제 위상에 걸맞게 ODA 규모를 올해보다 2조 원 확대한 6조 5천억 원 수준으로 편성했습니다. 늘어난 ODA 예산은 우리 기업과 청년의 해외 진출 등 국익 증진에 도움이 되는 전략적 분야에 중점 편성하겠습니다”고 말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후 재건을 위한 ODA 예산이 크게 늘었는데, 국토교통부 등은 ODA가 한국 기업의 우크라이나 재건 시장 진출을 돕는 도구가 될 거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정부가 말하는 해외 출국자와 개도국 질병 예방 사이의 “관련성” 논리와 부담금 정비를 통해 개발 산업이 받는 혜택의 연장선에서 생각해 보면 ODA 예산에 대한 정부의 주요 관심사도 글로벌 연대나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의 기여보다는 국가의 “경제 위상”과 기업의 해외 진출을 통한 “국익” 증진에 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다시 말해서, 정부에게 ODA는 어디 가서 체면치레하고, 한국 기업이 해외 나가서 돈 버는데 도움을 주는 도구에 가까운 것이다.


ODA가 꼭 이타적이고 완전히 인도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리고 정부는 글로벌 보건 협력은 해외 출국자와 천원만큼의 상관도 없지만, 땅을 파고 건물을 올리는 그런 개발 산업에 특혜를 주고, 그들의 해외 진출에 ODA를 활용하는 것은 민생과 국익, 국제개발협력에 좋은 것이라 꽤 진심으로 믿는다고 생각한다. 정부뿐 아니라 그간 국제개발협력 시민사회의 많은 단체도 한국의 “경제 수준”에 걸맞은 ODA 예산 확대라거나, “한국 진출 촉진”, “청년 일자리 확대”, “한국의 비교 우위”처럼 국경에 갇힌 양적 논리에 편승해 몸집을 불려왔다. 나는 이런 식의 이야기가 모든 것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걱정이고 불만이다. 이런 식이면 어느 날 개발도상국의 “쓸모”가 다 해 “관련성”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ODA 예산 전체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지 않을까?


해외 출국자와 글로벌 보건 사이에 있는 “관련성”을 천원어치도 인정하지 않는 정부의 질병퇴치기금 납부금 폐지 시도는 잠식되어가는 국제개발협력의 가치와 지향을 다시 논의할 좋은,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다. 다행히도 납부금 폐지를 위해선 법 개정이 필요하기에 아직 시간은 있다. 사실 2011년 기금 폐지에 맞서 입장문을 내고 대국민 서명운동을 전개한 KCOC, 굿네이버스, 월드비전, 세이브더칠드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등이 다시 앞장서서 행동한다면 기금을 지켜내는건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했던 식으로 마치 커피 한잔 값이면 당신이 “아프리카 어린이”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식의 “착한” 서사로 기존 납부금의 존치나 ODA예산의 민관협력 배정 증가를 “부탁”하는데 그치는 것은 또 다른 진부함을 더할 뿐이다.


출처: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2011년 대국민 서명운동 페이지 일부 캡쳐


지금 필요한 것은 진부한 언어로 매끈하게 닦인 쉬운 길 대신, 어렵고 근원적인 질문에 직면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 위상”을 운운하거나 누군가의 구원자 콤플렉스를 이용하는 대신, 국제개발협력이 도대체 무엇인지, 왜 거기에 한국 시민의 세금과 후원금, 연대가 필요한지를 명확한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 국제질병퇴치기금 납부금 이야기라면 해외여행과 글로벌 보건, 글로벌 부정의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있는지를 끈질기게 설명하며 국제질병퇴치기금 납부금은 폐지가 아니라 오히려 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 ODA에 대해선 “국익” 논리에 편승하는 대신, 정부의 ODA가 해야 할 역할은 “우리 기업” 진출의 길을 트는 데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시민 연대를 위한 길을 닦는 것이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한국 정부가, 나아가 한국 사회가 갇혀버린 콘크리트 세계관과 발전관에 사람을 돌려놓고, 사랑을 담고, 글로벌 연대의 숲을 가꾸는 것이 남반구와 북반구를 오가는 국제개발협력 단체와 활동가들이 오래전부터 꾸준히 해야 했을 일이고 지금이라도 당장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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